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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대전역~충남도청 대로의 민주항쟁 모습 © News1 |
“청주 곳곳에서 파출소 4~5개가 돌과 화염병으로 불에 탔다. 그 결과 노태우-전두환 항복선언으로 마무리됐다.” “교과서 속에만 나오는 이야기로, 한국전쟁 같은 느낌이다.”
9일 오후 청주 충북NGO센터 대회의실에서 열린 ‘6월 항쟁 30주년 기념토론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당시 상황을 이같이 설명했다.
이날 ‘시민의 눈으로 본 6월 항쟁’에 나온 참석자들은 자신이 목격한 1987년 충북 6월 항쟁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대학생으로 시위에 참가했던 김재수 우진교통 대표는 “충북에서는 4월부터 시작됐다. (6월에는)중앙공원~수아사까지 큰 도로가 (시위에 나온 사람들로) 꽉 찼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날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이 청주 중심가인 육거리시장~상당공원 도로를 가득 메웠다. 학생들이 주축이었고, 건물에서는 넥타이 부대들이 시위대를 응원했다.
도로 주변 약국의 약사들은 최루탄에 눈물, 콧물을 흘리는 시위대에게 솜과 마스크를 나눠주기도 했다.
김 대표는 “1주일 후 인천 투쟁에 참가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형사들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체포됐다”며 “청주 이마트 앞에 있었던 단층 건물 지하실에 5일 정도 갇혀 있었다”고 당시 겪은 고초를 토로했다.
충북민주화운동 계승사업회 정지성 집행위원장은 “충북대 교수님 36분이 시국선언을 했고, 전두환이 발표한 호헌(護憲)조치 이후 목사님들이 머리를 깎으며 항거했다”며 “청주 곳곳에서 파출소 너댓개가 돌과 화염병으로 불탔다”고 말했다.
당시 충청일보 수습기자였던 지용익 충청미디어 대표는 “87년 6월 12일 충청일보에 첫 출근을 했는데 충북대 학생들이 시내 진출을 하면서 (당시 유일한 지방신문인 충청일보 앞에서) ‘관제언론 물러가라’를 외쳤다”고 그해 6월을 회상했다.
그러면서 “30년전 6월 항쟁이나 최근 촛불 상황이나 언론이 받는 평가는 동일하다. 그때도 (언론은) 적폐로 인식됐다”고 덧붙였다.
당시 정식품 노동자였던 조인호씨는 “전노협(현 민노총) 회원들이 퇴근 하고 성안길에서 호떡을 팔았는데 도청에서 기습시위하다 전경들 몰려나오면 도망가는 시위대에게 소주 한 잔씩 대접하는 게 즐거움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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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후 충북NGO센터에서 열린 6월항쟁 3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송재봉 센터장이 인삿말을 하고 있다. © News1 / 김용빈 기자 |
유영경 충북여성포럼 대표는 시위에 참가했던 남편과 자신의 얘기를 들려줬다.
유 대표는 “당시 대학 4학년이었던 남편(임대성)이 남궁병원에서 마이크를 잡고 시위를 이끌었다”면서 “(자신도) 공단에서 노동법 준수 전단지를 돌리다 잡혀 지하실에서 고문을 당했다. 무서운 남자와 대면하면 몽둥이로 때렸다. 그때 처음 맞아봤다”고 증언했다.
최진아 충북연대회의 사무국장은 “너무 어려서 기억이 없다. 제 또래들에게는 87년이 교과서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에 가깝다”면서 “(6월항쟁이)한국전쟁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정미진 충북RCY 간사는 “주변에 비슷한 일을 하는 친구가 없었다. 그 친구들이 용기가 없어서 활동을 안 한 게 아니다”면서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끈에 묶여있는 듯했다”고 설명했다.
2부 행사에서는 허석렬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가 ‘6월 항쟁과 87년 체제의 30년, 한국 민주주의의 전망’을 주제로 발표했다.
허 교수는 “이제 자유주의 2기 정권인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며 “이 정권은 자유주의 정권으로서의 한계 내에서 개혁을 추진할 것이며, 급진적 민주주의 요구와 계속 충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결국 새로운 시대의 민주주의의 내용은 민중들이 사회운동을 통해 어떻게 사회적 권리를 확보하는가에 달려있다”고 강조했다.